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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에세이/단편적 사유들-짧은 에세이, 철학 단상, 문장 실험

단편적 사유들 EP.4 — 어떤 순간은 설명보다 오래 남는다

 

설명하지 않는 순간들의 기록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말로 붙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침묵 속에 두면 오래 남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 우리의 결을 만든다.

고요한 새벽빛 속에서 멈춰 선 한 사람의 흔들림을 그린 EP.4 일러스트
단편적 사유들 EP.4 — 설명하지 않는 순간들의 기록

DESCRIPTION

문득 떠오른 새벽의 장면, 말로 설명할 수 없기에 더 오래 남는 감정의 순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고요한 빛과 내면의 진동을 담아낸 EP.4 대표 일러스트.


사람은 참 이상하다. 잊고 싶은 순간은 오래 남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쉽게 흩어진다. 말로 설명하면 금세 낡아버릴 감정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래전 새벽의 한 장면을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내 인생의 결을 조용히 바꿔놓은 그 순간을.

 

그날 새벽은 유난히 차가웠다. 들숨이 폐 깊숙이 닿기 전에 얼어붙는 듯한 감각. 귀 밑으로 스치는 찬 공기, 손끝에 남아 있던 미세한 떨림. 나는 그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하는 순간, 그 장면이 가진 온도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묵묵히 그 새벽을 지나왔고, 지금도 그 침묵 속에서 배운 것들을 꺼내 본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갈라놓는 것은 거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사람을 바꿔놓는 건 아무도 모르는 아주 작은 떨림이다.

 

파동처럼 번지고 사라지는 그 흔들림이 삶의 방향을 조용히 밀어준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무시하기 쉽지만, 돌아보면 언제든 그 진동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그 새벽, 나는 길 한복판에서 잠시 멈춰 섰다. 가로등 불빛이 쌓인 눈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나 '쓸쓸함' 같은 언어는 그 순간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그 장면 자체가 나를 붙잡았고, 나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 붙잡힘에 조용히 응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어떤 순간은 이유 없이 나를 변화시키고, 설명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감정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 곡선은 시간을 자유롭게 구부린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고, 미래를 잠시 뒤로 밀어낸다. 나는 그 곡선 위를 걷고 있었다.

 

한 번은 누군가 내게 물었다. "왜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세요?"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억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이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말하고 나서 스스로도 놀랐지만, 그 문장은 결국 맞는 말이었다.

 

삶은 거대한 장면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어깨 너머로 스쳐 지나간 빛, 유리창에 흐른 물방울 하나, 귀 끝에 남았던 온기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잔향이 우리를 오래 지탱한다.

 

나는 그 새벽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그 마음과 온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남겨둔 자리,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온기, 그런 것들이 쌓여 우리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다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행위는 결국 시간을 복원하는 작업이고, 흩어진 사유들을 한곳에 모아 작은 우주를 꾸리는 일이다. 나는 그 우주를 매일 다시 걸어간다.

 

그리고 쉼표,는 알고 있다 쉼표가 쓰는 문장들은 겉으로는 조용해 보여도 내부에는 계속해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흐른다는 걸. 그 진동이 바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이 시리즈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작가의 말

어떤 장면은 설명하려고 하면 오히려 멀어진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들을 조용히 꺼내어 기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글이 당신의 어느 새벽과도 닿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어줘서 고맙다.
오늘의 당신 마음도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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