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오후 세 시에 나왔다.
가방은 가벼웠는데 마음은 조금 무거웠다.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일들이 이미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피로가 먼저 도착해 있는 느낌.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가기 싫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286번 게이트를 찾아가야 했다. 그런데 268번을 286번으로 잘못 보고 한참을 시드니행 탑승구 앞에 앉아 있었다. 이상했다. 뭔가 결이 다르다는 느낌. 티켓을 다시 확인했다. 286번. 숫자 두 개 차이로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캐리어를 끌고 1500미터를 걸었다. 거의 운동장 몇 바퀴를 도는 거리였다. 도착해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방송이 나왔다. 게이트 변경. 249번.
게이트는 바뀌어도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또 걸었다. 이번엔 2000미터 가까이.
거기에 3시간 30분 딜레이까지.
오늘은 완전히 극기훈련이었다. 공항 안에서만 거의 3500미터를 걸었고, 일정은 계속 밀렸다. 한 번은 잘못 보고, 한 번은 방송으로 바뀌고, 한 번은 딜레이로 멈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짜증이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꼬이지?” 싶었는데, 두 번째 이동쯤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게이트는 세 번 바뀌었지만 목적지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가는 곳은 여전히 다낭이었다. 숫자는 바뀌고, 위치는 바뀌고, 동선은 길어졌지만 방향은 그대로였다.
문득 이게 앞으로의 한 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에 도착하면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도, 상황도, 말도, 일정도 계속 바뀔 것이다. 누군가는 말을 바꾸고, 누군가는 입장을 바꾸고, 누군가는 책임을 흐릴 것이다. 게이트가 세 번 바뀐 것처럼.
그런데 내가 해야 할 건 하나다.
목적지를 놓치지 않는 것.
이번에는 전쟁 모드가 아니다. 정리 모드다. 일주일 동안 조용히 준비하고, 3월 1일에 봉인을 해제할 계획이다. 히든카드라고 이름 붙였지만, 사실 그 카드의 본질은 사람도 아니고 강한 말도 아니다. 태도다.
급하게 휘두르지 않고, 감정에 섞지 않고, 타이밍을 기다리는 태도.
공항에서 나는 세 번이나 길을 수정했다. 잘못 본 숫자를 인정했고, 방송을 받아들였고, 다시 걸었다. 멈춰 서서 불평하기보다 티켓을 다시 확인했다. 그 작은 행동이 방향을 지켰다.
아마 현장에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 틀릴 수 있다. 보고가 어긋날 수 있다. 예상과 다를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확인이다. 분노가 아니라 구조다. 목소리가 아니라 결론이다.
오늘 나는 이동만 했을 뿐인데,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기 싫었던 이유는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또 버텨야 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항 의자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깨달았다.
나는 버티러 가는 게 아니다. 정리하러 가는 것이다.
이 차이는 크다.
게이트가 바뀌어도 목적지는 바뀌지 않는다.
변수는 많아도 방향은 하나다.
딜레이는 생겨도 출발은 취소되지 않는다.
오늘 공항에서 미리 힘들 것을 당겨서 해버린 기분이다. 걷고 또 걸으며 몸은 조금 지쳤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렬되었다. 베트남에서 힘들 일이 남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차분히 풀면 된다.
지금의 나는 조금 단단해졌다.
3월 1일.
그날은 설명이 길지 않을 것이다. 감정도 섞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보고, 듣고, 정리한 뒤에 짧게 말할 것이다.
“이 방향으로 갑니다.”
그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공항에서의 하루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숫자를 다시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고, 마음을 다시 세운 시간이었다. 길이 멀어질수록 다짐은 또렷해졌다.
나는 오늘, 세 번의 게이트 변경 끝에 다시 섰다.
그리고 안다.
게이트는 또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by쉼표,
'쉼표의 서재 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결정은 빠르게, 실행은 끝까지 (0) | 2026.02.20 |
|---|---|
| 책임의 선을 다시 긋다 (0) | 2026.02.19 |
| 흔들리는 구조 위에 다시 선다 (0) | 2026.02.18 |
| 쉼표의 서재 일지–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오래 간다 (3) | 2026.02.12 |
|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 (0) | 2026.02.01 |